2018년 3월 21일. 어느, 인적 드문 공원.
“무턱대고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용서해 달라는 말만 반복하지 마세요.”
A씨는 냉정을 유지했다.
“가해 사실을 인정해서 사과하러 왔다고 정확히 말하세요.”
그녀가 원하는 건, 형식적인 사과가 아니었다. 그날, 그 일에 대한 인정과 반성이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너무 바보 같은 일을…. 술에 너무 취해서… 제가 원래는 좋은 사람인데.”
“아니요. 그때 많이 취하지 않으셨어요. (노래방) 회식 장소에서 빠져 나와 ‘밀실’을 따로 잡을 정도로….”
김생민은,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그때는….”
“미안합니다. 기억이 납니다. 용서해 주세요.”
2008년 가을에 일어난, 2건의 성추행. 김생민은 그 중 1명의 피해자 앞에 섰다. 그날의 잘못을 인정했고, 그때의 상처를 사과했다.
♦ 2008년, 서울의 한 노래방
A씨는 2008년 가을을 기억하고 있다. 잊혀지지 않는 그날의 회식. 서울의 한 노래방이었다.
그는 당시 한 방송사에서 스태프로 일하고 있었다. 해당 프로그램 노래방 회식에는 메인 MC 및 리포터, 메인 PD, 메인 작가, 스태프 등이 대거 참석했다. 김생민도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먼저 퇴근하던 여자 스태프가 저를 부르더군요. ‘김생민 씨가 너한테 할 말이 있다는데? 복도 끝방에 계신대’라고 했습니다.” (이하, A씨)
A씨는 실수한 게 있는지 떠올렸다. 김생민과는 목례 정도만 주고 받던 사이. 일적으로 부딪힐 게 거의 없었다. A씨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김생민은 끝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혹시 저 때문에 불편한 게 있는지, 문간에 선 채로 물었습니다. 김생민 씨는 ‘내가 그럴 게 뭐 있냐’, ‘일단 이쪽으로 오라’고 말하더군요.”
A씨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여기(입구) 있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생민이 억지로 끌어 앉혔다. A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완력에 제압당한 것.
“두 팔로 저를 휘감았습니다. 손으로 밀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아무리 저항해도 (힘으론) 이길 순 없었습니다.”
♦ 그날, 그곳의 강제추행 2건
A씨를 찾는 전화가 울렸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도 들렸다. (옆방)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김생민은 황급히 떨어져 앉았다. 그리고 선배가 나타났다.
“선배는 ‘(회식자리에서) A가 안 보여서요. 필요해서 데리고 갑니다’라고 말했어요. 김생민 씨는 태연하게 ‘어, 그래야지. A는 앞으로 화이팅하고’라며 웃음을 보였습니다.”
A씨의 머리는 흐트러졌다. 옷은 구겨졌다. 선배는 화가 났다.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혼자 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다그쳤다.
“그 상황을 바로 다시 떠올리는 건, 굉장한 고통이었습니다. 별일 아니라고 말하는데…. 선배는 ‘너, 속옷 끈이 풀어진 것도 몰랐냐’며 고쳐줬습니다. 그렇게 모든 상황을 털어놓게 됐습니다.”
실제로,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날, 또 다른 스태프도 성추행을 당했다. B씨 역시 그 노래방에서 아찔한 상황을 맞았다.
그러나, 혼자만의 문제였다. 김생민은 2번의 추행에도 변함없이 출연했다. A씨는 방송국을 나왔다. 몇 달 뒤, 자진해서 퇴사했다.
♦ 성추행 1건이 사라졌다
A씨에 따르면, 메인 작가가 3차 회식 자리에서 전화를 걸었다. 피해 사실을 물었다. 그러나 A씨는 그가 떠들썩한 술자리에 있어 말하길 꺼렸다. A씨는 다음날, 메인작가를 대면하고 정식으로 성추행을 보고했다.
동시에, 스태프 B씨의 일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방송사의 처리 과정은 상식 밖으로 전개됐다. A씨 성추행 사건이 누락된 것. A씨는 사과를 받지 못했고, B씨는 직접 사과를 받았다.
누군가 2건의 사건을 축소시켰다. 1건(B씨)은 문제삼고, 나머지 1건(A씨)은 덮은 것.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메인 PD와 작가의 주장도 엇갈린다.
메인 작가는 ‘디스패치’와의 통화에서 “그날 2건의 성추행이 일어났다. 메인 PD에게 분명히 항의했다”면서 “하차도 요구했다. (김생민이) 왜 1명에게만 사과를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해당 PD “김생민의 성추행 사건이 문제가 됐다. 노래방 회식에서 벌어진 일이 맞다”면서 “그러나 1건으로 알고 있다. (2건을) 1건으로 축소한 게, 아니다. B씨 건만 들었다”고 답했다.
김생민 측은 ‘디스패치’에 “담당 PD한테서 B씨 사건만 전해 듣고 직접 사과했다”고 말했다. A씨 건을 묻자, 머뭇거렸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전화가 왔다.
“당시 메인 작가를 통해 A씨 사건을 (이제서야) 확인했어요. 그 때는 B씨 사건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A씨 문제를 인지하지 못했어요. 지금이라도 사과할 수 있을까요?” (이하, 김생민)
♦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표면적으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2건의 성추행은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 김생민은 여전히 방송에 출연했다. PD도, 작가도, 그 자리였다.
A씨는 제작진에 항의했다. 김생민의 퇴출도 요구했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았다. ‘김생민이 잘못했다고 하더라’는 말을 메인 작가로부터 들은 게 전부였다.
(그러나 A씨는, 김생민이 사과한 대상은 B씨임을 이번 취재를 통해 알게 됐다.)
“김생민이 프로그램을 나가야 한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메인작가는 ‘방송가에서 이런 일로 출연진을 자르는 법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스태프가 나가면 나갔지, 연예인은 나갈 수 없다면서요.”
A씨는 그래서, 오기로 버텼다. ‘가해자의 경력이 단절될 수 없다면, 피해자의 경력 또한 단절될 수 없다’는 각오였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스튜디오 촬영현장에서 밀려났다. “김생민을 보는 게 불편하지 않냐”는 이유가 따라 왔다. 팀에서 감도는 (이상한) 분위기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참았습니다. 물러서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점점 밀려났습니다. 제 프로젝트가 (상의도 없이) 외주 인력으로 넘어가고….”
A씨는 결국 해당 프로그램을 스스로 그만뒀다.
♦ 방송사가 묵과한 ‘미투’
‘디스패치’는 해당 사건을 3주 넘게 취재했다.
먼저, 진위 여부를 확인했다. 신빙성을 따진 것. 크로스 체크만 1주일 이상 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결정적 증언을 확보했다. 김생민의 노래방 강제추행 2건은 확실했다.
다음으로, ‘미투’의 본질을 검토했다. 김생민과 제작 스태프의 위치도 따졌다. 갑과 을의 관계는 아니었다. (물론 동등한 위치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미투’였다. 방송사의 구조적 병폐가 만든 미투. 방송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상처는 무시되는 미투.
A씨는, 당시에 들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다음과 같다.
“너만 당한 것도 아니고, B는 너보다 더 심한 일을 당했다.”
“그런데 B는 출연진이 나가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출연진이 술김에 한 일로 (프로에서) 나가면 방송을 어떻게 이끌어가냐.”
“이런 일은 방송계에서 비일비재하다. 스태프면 스태프답게 생각하라.”
“경찰로 끌고 가서 금전적 합의를 받고 싶냐? 이런 일은 방송국에 소문이 금방 퍼진다.”
“김생민이 보기 싫을테니 스튜디오 업무에서 손을 떼라.”
2008년, 가을. 아무 일도 없는 듯 지나갔다. 2018년, 봄. A씨는 결심했다. 그리고 ‘디스패치’에 6장의 편지를 보냈다.
“(중략) 이런 일들이 방송가에서 암묵되고, 그로 인해 누군가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간다면, 나 역시 가해자의 대열에 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찢어가며 이 글을 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편지 내용 中)
♦ 2018년 3월, 10년 만의 사과
2018년 3월 21일. 유난히도 쌀쌀했다. 비가 오더니, 눈이 됐다.
김생민은 A씨를 찾아갔다. ‘디스패치’도 동행했다. 그는 A씨를 알아봤다. “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김생민은 “미안합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과를 하신다니, 받겠습니다. 용서도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기사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방관하고 싶지 않습니다.”
A씨는 말을 이었다.
“그 일 이후, TV 화면에서 조차 김생민 씨를 보는 것을 피해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10년이란 세월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이 안됩니다.”
그녀는 방송국에도 책임을 물었다.
“해당 프로그램 책임자들의 태도 역시 부적절했습니다. 메인 작가는 ‘김생민이 잘못했다고 빌더라’는 말로 대신 사과를 전해왔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김생민이) B씨에겐 직접 사과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제 사건은 (제작진으로부터) 전해 듣지 못했다고요? 김생민 씨, 그동안 정말 기억이 안나서 제게 스스로 사과를 하지 않은 겁니까? 지금 일어나는 일은 김생민 씨와 방송국 책임자들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김생민은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어떤 말을 해도 변명으로 들릴 것 같아서,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 밖에 못하겠습니다.”
A씨의 일갈처럼, 김생민이 시작했고 방송사가 묵인했다. 그리고 상처는, 고스란히 A씨의 몫이 됐다.
“성범죄는 무마될 수 없습니다. 방송국의 암묵적인 행위가 부당한 노동관행으로 굳어져선 안됩니다. 방송가에서 더이상 그 어떤 성범죄 피해자가 나오질 않길 바랍니다. (A씨)
2008년, 누군가 일을 축소했다. 김생민을 위한 것일까. 방송국을 위한 것일까. 프로그램을 위한 것일까. 확실히, A씨를 위한 일은 아니었다.
덕분에, 김생민은 10년 동안 재기할 시간을 얻었다. A씨는 10년 동안 잊으려 했다. 용서할 방법 조차 없다. 10년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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